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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린이 : 관리자 조회수: 5570 2012-12-07 13:45:43
도서명 : 백성은 물, 임금은 배

≫ 저자 : 이정옥 엮음
≫ 정보 : 410면|2012.11|값 20,000원| ISBN 978-89-6327-220-7 03810



“백성이 궁하면 어찌 인심이 변하지 않겠습니까?”

12월 19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꼭 읽어야 할 책!

이상규 前국립국어원장, 경북대학교 교수와 이정옥 위덕대학교 교수 엮음

300년 전, 백성 편에 선 목민관 이형상
“국고는 줄더라도 백성의 생활은 충족하게 할 수 있는
정치를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감히 아룁니다.”



병와 이형상은 백성들의 편에 서서 당화에 휩쓸린 조선조 후기 관료사회의
모순들을 혁신하려고 노력한 학자임과 동시에, 청렴한 ‘정치인’이었다.

백성은 물이라는 비유의 말씀
임금은 배이니 조심해야 하는 것
진실로 깨우치고 삼가지 않으면
경적(經籍)을 상고해 본다면
성인의 가르침이 분명하도다



1. 300년 전 가르침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

2012년 12월 19일. 18대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고 있다. 새로운 정치를 위해 열변을 토하는 후보자들 가운데서 우리 국민도 이제는 새로운 희망을 고대하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대선 후보자들과 국민들이 주목해야할 인물이 있다. 조선 후기의 문신 병와 이형상(효종 4년~영조 9년)이다. 이 인물을 주목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병와 이형상은 백성들의 편에 서서 당화에 휩쓸린 조선조 후기 관료사회의 모순들을 혁신하려고 노력한 학자임과 동시에, 청렴한 ‘정치인’이었다.
병와는 전 생애를 통해 총 142종 326책이라는 방대한 분량의 저술을 남겼다. 목민관으로서 경험과 성리학적 사유는 새로운 실학의 불을 당기는 가교역할을 해낸 것이다. 그의 생애 경험이 고스란히 방대한 저술로 남아 그의 저술 가운데 대표적인 <둔서록(遯筮錄)>, <악학편고(樂學便考)>, <강도지(江都志)>, <남환박물지(南宦博物誌)>,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등은 국가 보물(제 256호 1~10)로 지정되었다.
한 개인이 지켜내야 할 정직하고 깨끗한 숭고한 삶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또 한 개인의 삶이 얼마나 고결해야 하는지를 알리기 위해 편찬한 이 책에는 300년 전 병와가 이루어낸 인문학적 성찰 또한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요사이처럼 공교육이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을까. 가정교육 부재, 인성교육의 실종의 시대이다. 이전 시대에 나의 이웃을 위해 헌신했던 병와가 인성 교육과 가정교육을 어떻게 실천했는지 당쟁의 파랑 속에서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탐구했는지 우리 모두 한 번쯤 찾아볼만하다.
대선을 앞두고, 새로운 정치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후보자들은 선조 병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자신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해야 하는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시대는 변했지만, 지도자가 가져야 할 덕목과 자세는 바뀌지 않는다. 그것이 300년 전, 백성을 사랑하고 녹슨 관료사회를 개혁하려 한 병와의 가르침을, 현 사회를 살아가고 이끌어나가는 사람들이 주목하고 받아들여야할 이유이다.



2. 백성과 임금 = 국민과 지도자

대저 사람의 세상이란 하나의 큰물이고, 백성의 마음은 하나의 큰 바람이다. 성난 물결이 해(임금을 상징)를 향해 쏟아지고 급한 여울이 산을 밀치며, 무너져 내린 구름과 자욱한 안개가 바다를 가리고 하늘을 막아 천오(天吳, 북두의 중심별)가 잠깐 보였다가 금방 숨어 암초가 이미 지났는데 다시 부딪치게 되는 것이 바로 험악하다는 것이다. 막연하고 어두운 속에 감추어져 있다가 갑작스레 거울같은 평면의 물결을 격렬하게 뿜어대어 하늘에 닿을 형세를 이루어서 돛대가 부러지고 삿대가 망그러져서 방황하고 정신이 없어 지척의 사이를 알 수가 없고 담이 떨어지고 정신이 나가는 것이 이른바 무섭다는 것이다. 사해(四海)가 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넓다는 것이다. 그것들이 임금을 떠받들고 있기 때문에 백성이 귀하다는 것이요, 거기에 붙어있기 때문에 임금이 가볍다는 것이다.
-본문 <백성은 물, 임금은 배>편 중에서


배와 물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다. 물이 배를 떠받들고 있어 배가 스스럼없이 나아갈 수 있다. 임금은 절대 혼자 이 나라를 꾸림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지금으로 말하면, 백성은 국민이 될 것이고, 임금은 대통령, 즉 이 나라의 지도자라고 말할 수 있다. 세상에 물 없이 나아가는 배는 없다. 물과 배의 관계처럼 국민과 지도자의 관계 또한 떼려야 뗄 수 없다. 병와의 이러한 생각 자체가 바로 이 책의 제목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는 것이다.
1부 ‘백성이 궁하면 어찌 인심이 변하지 않겠습니까?’ 중‘백성은 물, 임금은 배’, ‘전정(田政)은 공평 균등하게 정해야 할 것입니다’ 등에서는 목민관으로서의 개혁적인 삶을 조명해 보았다. 가는 곳마다 백성들의 민풍을 바로 잡고 가난한 백성의 편에 서서 전제 개혁이나 세금을 줄이기 위한 합리적 방략을 제시했던 상주문을 읽으면 병와의 백성 사랑하는 절절한 마음을 읽어낼 수 있다.
동래부사 시절, 왜관에 머문 왜인들의 횡포와 그에 동조하는 관원들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이 배여 있는 ‘왜(倭)에게 뒷바라지를 한다는 것은 대의에도 벗어나며’ 편에서는 중앙 환로에 있는 예조판서에게 신랄한 비판을 서슴치않은 청백리의 올곧은 모습이 통쾌한 드라마의 한 장면으로 선명하게 보인다.


예로부터 교린(交隣)은 모두 이쪽에서부터 틈이 생기는 법이니 신의가 돈독하고 거기다 방어 즉 국력이 견밀하면 수모를 당하는 일이 어찌 있겠습니까? 그들이 말하는 구송사(九送使)는 오랫동안 한 나라의 큰 폐단이었는데, 한 도의 백성들의 힘을 다하여 원수와 적인 왜(倭)에게 뒷바라지를 한다는 것은 대의에도 벗어나며, 대장부의 마음을 가진 자가 있다면 노하여 어찌 칼을 잡지 않겠습니까? 그뿐만 아니라 각 차왜(差倭)의 체류 기한이 89일, 혹은 100여일을 잡지만 이는 다만 공궤(供饋)해 주는 기한인데, 공궤가 끝난 뒤에도 혹 머물거나 가거나, 또는 가고 올 때 그 수가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여, 처음부터 점검하는 관례가 없는데다, 먼저 온자는 돌아가지 않고 새로 온 자는 재차 오니 그 수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만일 저들이 우리 모르게 정예군(精銳軍)을 길러서 갑자기 쳐들어온다면 그때는 무슨 방책으로 막겠습니까?
-본문 <국력이 견밀하면 수모를 당하는 일이 어찌 있겠습니까>편 중에서



3. 공평 균등, 평등 정치를 구현하다

병와의 업적 가운데서도 제일인 것은 백성의 편에서 나라를 꾸려가고, 백성의 목소리를 귀담아 들었다는 점이다. 민생의 괴로움을 알지 못하는 지도자가 과연 지도자의 역할을 제대로 한다고 할 수 있을까? 정치에 대해 불신하는 국민들이 많아질수록 민심은 흉흉해지고, 국민 참여는 적어질 수밖에 없다. 이럴 때일수록 지도자와 국민의 소통이 중요한 문제로 떠오른다.
병와는 국고가 줄더라도 백성의 생활은 충족하게 하는 정치를 해야 한다고 했다. 세금이 무겁다는 백성들의 원망을 듣고, 문제점을 조목조목 따져 밝히는 것이다.


첩(牒)으로 보고합니다. 전정(田政)의 사안은 백성의 편안함과 괴로움에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되니 잘 따져서 공평균등하게 정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입니다. 본도에 부과되는 세금이 다른 도에 비해 배나 무거운데 이것이 그대로 잘못 답습되어 내려와 지금이 와서는 참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본주에서 세금을 거두는 곳이 전부 71주(州)로 전결(田結)을 모두 마감하였으나 세금을 무겁게 거둔다는 백성의 원망을 눈으로 보고도 아뢰지 않으면 맡은 직책을 다하지 못하는 부끄러움이 있으니 감히 번거롭게 아뢰려 합니다. (…중략…)
-본문 <국고는 줄더라도 백성을 충족하게 하는 정치를>편 중에서



병와는 또한, 조부에게 물려받은 호남의 가전노비 1천명을 속량해주었다. 노비들이 자신들의 집에서 일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 여기지 않고, 그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전부 양민으로 풀어주었다.

병와가 제주도에서 돌아오면서 호남에 들렀다. 병와의 조부인 이장형(李長馨 1598~1655)으로부터 물려 받은 호남의 가전노비가 약 1천명을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중략…) 이 글은 속량의 조건으로 재전을 요구할 수 있었지만 이를 다 포기하고 전원 속량해 주는 조선 후기 노비 해방의 선언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천여 구의 노비를 재산으로 따지면 엄청난 재물이었지만 병와는 “약 천여 가호의 노비가 재물이 아니다. 너희들은 어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들에게 불리하게 하지 않겠다.”고 말하고는 옛날의 노비 문서를 불에 태워버리고 그들을 전부 풀었다. 병와야말로 조선 후기 사회 변동의 단서를 이끌어낸 위대한 사회개혁의 선구 주자라고 할 수 있다.
-본문 <약 천여구(口)의 노비가 재물이 아니다>편 중에서


이 밖에도 책에서는 병와의 방대한 저술을 간단히 종합 정리하고, 성리학의 실천적 구현, 악학 이론의 뼈대를 세운 예약이론까지 만날 수 있다.
병와 가문이 자손을 어떻게 가르치고 교육했는지도 알 수 있다. 이는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가정교육에 도움이 될 것이다.
제주 목사 시절에 한라산을 다녀온 여행기도 읽을 수 있는데, 병와의 풍유와 자연을 바라본 시선, 민풍의 관찰까지 읽을 수 있다.

300년 전의 병와 이형상은 가노들을 모두 속량한 과감한 실천적 지식인의 모습이었다. 자신의 가족을 따뜻하게, 때로는 엄하게 보듬는 모습도 있었다. 또한 백성들의 소리에 귀 기울여 그들이 사는 세상을 좀더 편안하게 만들려 노력했다. 대외관계에서도 의지를 굽히지 않고 자신의 뜻을 추진했다. 이것이 진정한 정치인의 자세가 아닐까.
경제가 어렵고, 민심이 동요되고, 정치인들, 소위 윗사람들만 풍족하고 편안한 나라를 바라는 국민들은 없을 것이다. 이 책 속에는 이 시대의 정치인들이 자신들을 뜻하는 배가 뒤집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신들을 나아가게 해줄 넉넉하고 잔잔하고 넓은 물, 바로 국민을 생각할 때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4. 머리말

필자는 영천인으로 한빈한 집안에 태어나 학문의 길을 걸으며 영남의 명문 학인의 집안인 병와 이형상의 가문에 가연을 맺었다. 병와의 11세 후손인 국립국어원장을 지낸 남편과의 인연이 어느새 30년이 훌쩍 넘었고, 두 아들도 눈 깜빡할 새에 다 컸다. 두 사람 모두 학문 연구와 사회 활동한다는 핑계로 가정교육에 소홀하지는 않은 것인지 노심초사했다. 특히 어미로서의 도리를 제대로 못했다는 자책을 하곤 했다. 그런데도 두 아들은 큰 탈 없이 다 큰 것 같아 고맙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곧 성혼을 하고 가정을 꾸릴 나이의 아들들, 또한 공직에 뜻을 둔 아들들을 생각하니, 수신(修身)의 범절이 왜 중요한지를 그리고 몸가짐을 바로하기 위해 수신의 경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나이가 든 이 시점에 절절하게 깨닫게 되었다.  
그런 고민에 빠진 즈음에 300여 년 전 이미 인간 수련의 길을 앞서서 훌륭히 갈고 닦으며, 국가와 사회를 위해 참으로 헌신했던 병와 이형상 선생의 수많은 저서들이 바로 내 곁, 우리집 서가에 있음을 발견하였다. 세상사 어떤 것은 신선함의 가치를 가진 것도 있으나,  오랜 시간 숙성의 인연으로 맺어진 것도 있음을 알 즈음의 나이가 되자 발견하게 된 글들은 보석같이 반짝거렸다.
조선조를 관통하는 걸출한 대학자였던 병와 선생이 남긴 책속의 글귀가 차츰 가까이 큰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남의 눈에 자칫 가문의 자랑으로 여겨질까 두렵지만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 나와 같이 아이를 기르고 남편과 함께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가정교육을 위해서, 더 나아가 무엇보다도 국민을 위해 일하고자 공복(公僕)이 된, 또는 되고자 하는 이들에게 병와 선생의 글을 꼭 읽히고 싶었다.
사실 처음 이 책은, 내 아이들에게 선조의 위업을 알게 하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게 하기 위한 소박한 바람에서 시작한 일이었다. 그러나 글을 읽으면서 행간 속에서 300여년 전의 병와의 올곧은 목소리가 처음에는 낮은 목소리로 들리다가 점점 큰 울림으로, 때로는 꾸짖음으로, 때로는 따사한 목소리로 나를 바로 세움을 느꼈다.
요사이처럼 공교육이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을까. 가정교육 부재, 인성교육의 실종의 시대이다. 이전 시대에 나의 이웃을 위해 헌신했던 병와가 인성 교육과 가정교육을 어떻게 실천했는지 당쟁의 파랑 속에서,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탐구했는지 우리 모두 한 번쯤 찾아볼 만하다는 생각으로 출판하려는 용기를 얻었다.
현실적 이유를 또 하나 더 든다면,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자주 듣고 말하면서도 새삼스러운 이 명구. 요즈음 치국한답시고자 하는 사람들이 수신제가(修身齊家)하지 못한 불미스러움을 자주 목도함 때문이다.
세상이 어려울수록 한 사람 한 사람의 행동거지를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면 결코 아름다운 사회가 될 수 없다. 여기 병와 선생께서는 먼저 가정과 이웃을 바르게 이끌고 국가와 사회를 위해 그리고 힘없는 양민들을 위한 정치를 묵묵히 실천했던 목민관이었다.
이 책의 주인공인 병와 이형상(효종 4(1653)년∼영조 9(1733)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 자는 중옥(仲玉), 호는 병와 또는 순옹(順翁)이다. 효령대군의 10세손이며, 성균진사를 지낸 이주하(李柱夏)와 파평윤씨 사이에 난 둘째 아들이다.
숙종 3(1677)년 사마시를 거쳐 1680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환로에 나서면서부터 철저한 원칙주의자였다. 권력에 굽히지 않고 당화에 휩쓸린 조선조 후기 관료사회의 모순들을 혁신하려고 노력했다. 호조좌랑 재임 때는 동지사가 가지고 가는 세폐포(歲幣布)가 병자호란 이후 바쳐온 보포(報布)보다 9척이나 긴 것을 알고, 이것이 이후 무궁한 폐단이 될 것을 우려하여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늘어난 척수를 끊어버리고 보내었다.
성주목사로 재직시에는 민풍 교화에 힘써 20조의 훈첩(訓帖)을 반포하고 유생 150명을 선출하여 관비로 교육시키기도 하였다. 인조 때 의사 이사룡(李士龍)을 위하여 충렬사를 지어 그의 사적을 길이 남겼다. 한편 독용산성(禿用山城)이 파괴된 채 방치됨을 보고 민정(民丁)을 차출하여 3일 만에 완성시켰다.
동래부사 때에는 이 지역이 일본과 접경된 관문으로서 국방상 요지임을 절감하고 수비에 더욱 힘쓰는 한편, 당시 일본의 구송사(九送使)가 많은 폐단을 일으킴을 통감하여 이를 폐지시키려 노력하였다.
경주부윤 때에는 운주산(雲住山)의 토적 수천 명을 해산시켰으며, 향교와 서원에 교유하여 학풍을 진작시키고 향약과 향음주례를 강화하여 향촌 질서를 세우고 충·효·열을 민간에 장려하여 유교적 도덕정치를 실시하였다.
1703년에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제주의 누속(陋俗)을 일체 개혁하여 유속(儒俗)으로 바꾸게 하였다. 즉, 석전제를 행하였던 삼읍의 성묘를 수리하고 이름 높은 선비로서 선생을 정하여 글을 가르치게 하였고, 고을나(高乙那)·양을나(良乙那)·부을나(夫乙那)의 삼성의 사당을 세워 제주민의 신화를 존중하였다. 제주 해녀들이 나체로 잠수 작업하는 것을 일체 금지시켰다. 이때부터 비로소 제주 해녀들은 잠수복을 입기 시작하였다.
병와는 목민관으로서 경세치용을 실천하여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자 하였다. 한편으로는 학문을 진흥시키고 문화재와 고적을 수리, 보존하는 등 문화적 치적도 남달랐다. 백성들의 풍속을 시대정신에 맞게 교화시키고 생활개선을 주도하였다. 당시 백성들은 송덕비 4개를 세워 그의 맑은 덕을 칭송하였다. 그런 그가 청백리에 천거된 건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점점 격해져 가는 당파에 휩쓸리자 환로의 꿈을 접고 고향이 아닌 경상도 영천(永川)의 호연정(浩然亭)에 낙남하여 학문과 후학양성에 정진하였다.
병와는 전 생애를 통해 총 142종 326책이라는 방대한 분량의 저술을 남겼다. 목민관으로서의 경험과 성리학적 사유가 새로운 실학의 불을 당기는 가교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얻을 만한 대저술들이다. 그의 생애 경험이 고스란히 스며 있는 대표적인 저술, <둔서록(遯筮錄)>, <악학편고(樂學便考)>, <강도지(江都志)>, <남환박물지(南宦博物誌)>,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등은 국가 보물(제 256호 1~10)로 지정되었다.
마치 한 편의 역사드라마와도 같은 엄청난 사유의 진폭을 지닌 병와 선생의 삶을 간추려 내기가 쉽지 않았다. 1부 ‘백성이 궁하면 어찌 인심이 변하지 않겠습니까?’ 중‘백성은 물, 임금은 배’, ‘전정(田政)은 공평 균등하게 정해야 할 것입니다’ 등에서는 목민관으로서의 개혁적인 삶을 조명해 보았다. 가는 곳마다 백성들의 민풍을 바로 잡고 가난한 백성의 편에 서서 전제 개혁이나 세금을 줄이기 위한 합리적 방략을 제시했던 상주문을 읽노라면 병와의 백성 사랑하는 절절한 마음을 읽어낼 수 있었다.
동래부사 시절, 왜관에 머문 왜인들의 횡포와 그에 동조하는 관원들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이 배여 있는 ‘왜(倭)에게 뒷바라지를 한다는 것은 대의에도 벗어나며’ 편에서는 중앙 환로에 있는 예조판서에게 신랄한 비판을 서슴치않은 청백리의 올곧은 모습이 통쾌한 드라마의 한 장면으로 선명하게 보인다.  
병와는 조선조 신분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몸소 실천하며 개혁으로 이끌었다. ‘노비 해방의 선구자, 가족사랑’에서는 재산으로 치부되었던 가노들을 모두 속량한 과감한 실천적 지식인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의 가족과 자녀들에 대해 항상 엄격하지만 따뜻한 마음이 묻어 있는 몇 편의 편지글을 소개한다. ‘예악(禮樂)의 처음과 끝’에서는 성리학의 실천적 구현은 예악의 겸비에 의해 민풍을 순화하는 동시에 악학 이론의 뼈대를 세운 선생의 예약이론을 만난다.
‘병와의 여행기’편에서는 제주 목사 시절, 바쁜 목민관으로서 숨가쁘게 오른 한라산 기행을 함께 하는 기쁨도 누려본다. 또한 평소 병와가 존경하였던 여헌 장현광 선생을 뜻을 좇아, 입암 28경을 주유하며 관찰하기도 하면서, 여항의 민풍을 만날 수도 있었다.
2부에는 조선조 최대의 저술을 남긴 병와 이형상의 저술을 간단하게 종합 정리하고 번암 채재공이 쓴 행장과 대산 이상정이 쓴 발문과 함께 몇 편의 산문을 추록하였다.
병와는 어린 시절부터 일족이었던 지봉 이수광 가문, 그리고 식산 이만부 선생과 끊임없는 학문적 교류를 나누었다. 거기에서 발견한 그의 경학(經學)과 주역(周易)에 대한 방대하고 심오한 학문과 철학에 대해서는 아직도 우리 학자들의 손이 미치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는 생각도 가진다. 많은 연구가 이어질 것을 기대해 본다.
아직 완전히 공개되지 않은 병와 선조의 서책에 배여 있는 위대한 사상과 그 학문적인 세계를 간추려 많은 사람들에게 교양서로서 소개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글누림출판사의 도움으로 이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역사는 이성적일 듯하지만, 때로는 철저하게 비정하기도 하다. 사회 조직 또한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을 마구 휘두르는 비이성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가 하면 역사는 우리 개인이 직면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적인 삶을 이성적으로 윤색한 한 편의 드라마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학문은 가장 비이성적인 부분까지도 냉철하게 평가하고 해석하고 분석하여 대안을 제시할 책무가 있다. 그런 점에서 21세기, 이 시대는 인문학적 성찰을 더욱 요구한다. 비록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학문의 전당, 대학에서조차도 홀대받고 있지만…….
한 개인이 지켜내야 할 정직하고 깨끗한 숭고한 삶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또 한 개인의 삶이 얼마나 고결해야 하는지를 알리기 위해 편찬한 이 책에는 300년 전 병와가 이루어낸 인문학적 성찰 또한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빈한 목민관이요, 위대한 학자였으며, 따뜻한 인간이었던 병와 선생께 미흡하기 짝이 없는 필자가 추호의 누라도 끼칠까 가장 두렵다.
끝으로 일일이 거명하지는 않았으나 많은 선행 연구자들의 성과에 대해 감사한다. 어려운 출판사 사정에도 원고를 보자마자 곧바로 출판을 추진해준 글누림출판사 최종숙 사장과 이태곤 편집장, 안혜진 대리와 임애정 편집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드린다.
30여 년 가까이 날마다 학생들과 호흡하며 살다가, 작년부터 최근까지 20여 개월, 잠시 강단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었다. 이렇게 병와 선생의 글을 가까이 뵙고 되새기며 더 많은 내면의 성찰의 시간이 되었다. 게다가 책으로까지 출간할 기회를 얻음은 기대 그 이상의 큰 행운이었다.  

2012년 11월 초겨울 이정옥 삼가 씀.




6. 차례

1부  백성이 궁하면 어찌 인심이 변하지 않겠습니까?
첫 번째 글
백성은 물, 임금은 배
백성은 물, 임금은 배
항간의 말과 노래를 채집하여 책을 엮다
이인좌의 난을 토평하려다 무고의 혐의를
제주도의 실정과 풍속을 그림으로 남기다
백성이 궁하면 어찌 인심이 변하지 않겠습니까?
유랑 무리들도 하늘이 낸 이 나라 백성인데

두 번째 글
전정(田政)은 공평 균등하게 정해야 할 것입니다
국고는 줄더라도 백성의 생활은 충족하게 하는 정치를
이 세상에 일찍이 발견하지 못했던 중요한 유적이
풍습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해괴하여 통탄할 일
비로소 한라산을 명산으로 승격하여 제를 지내다
아래를 거느림에는 반드시 관용에 이를 것이다

세 번째 글
왜(倭)에게 뒷바라지를 한다는 것은 대의에도 벗어나며
외교에 있어서도 국익이 먼저요
관방의 시설에 대해 마땅히 미리 잘 대비할 수 있도록 강구해야
국력이 견밀하면 수모를 당하는 일이 어찌 있겠습니까
저 교활한 왜(倭)가

네 번째 글  
노비 해방의 선구자, 그리고 가족사랑
약 천여 구(口)의 노비가 재물이 아니다
집에 송곳 하나 꽂을 땅도 없어도
흩어진 것은 기운이고 없어지지 않은 것은 정신이니
마땅히 닦을 것은 오직 검소함뿐이다
게으른 습관으로는 선비가 못된다
너를 생각하면 눈물이 저절로 난다

다섯 번째 글
예악(禮樂)의 처음과 끝
예(禮)는 하늘의 도리, 악(樂)은 인성의 여운
우리나라에도 아악(雅樂)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음이 이미 잇소리에 치우쳐
명곡 최석정의 담론 : 성음과 악학을 완성하다
심지어는 공당(公堂)에서 노래 부르며 술병을 두드리는 자까지 있으니
다른 나라의 언어를 우리 문자로 기록하지 못할 것 없으니

여섯 번째 글
병와의 여행기
한라산을 오르다
입암유산록(立巖遊山錄)

2부 새롭게 주목할 인물, 병와 이형상
첫 번째 글
조선시대 목민관 병와 이형상
호를 병와(甁窩)로 삼은 이유
박상기(薄相記)
단금명(檀琴銘)
오성찬(五聖贊), 공재 윤두서의 <오성도>
숙종 임금의 유서(諭書)
병와의 인장과 낙관(落款)
혼돈각명(混沌殼銘)

두 번째 글
조선 최대의 저술을 남긴 병와 이형상
병와 이형상의 저술
나는 부자에게는 더 부자가 되게 하지는 않겠다
포부가 크면 세속과는 부합되지 못하고


7. 엮은이

이정옥

이정옥은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 대학원에서 <내방가사의 미학적 연구>로 석사학위를, <내방가사의 전승과정과 향유층의 의식 연구>;로 계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경력
위덕대 교수, 중국해양대학교 객원교수,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자문위원, 경상북도 여성정책개발원장, 미래여성회 회장, 한국교육과정 평가원(KICE) 연구위원(교육과학부 중등교과서 검증위원), 경상북도 정체성포럼 화랑분과 부위원장, 포항시축제위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 자료 구축사업(내방가사데이터베이스) 책임연구원, 수필가, 경주수필가협회 회원.

저서
<;내방가사 향유자 연구>(박이정), <영남 내방가사1-5>(국학자료원), <경주에 가면 행복하다>(도서출판 세미), <이정옥 교수와 함께 하는 이야기로 만나는, 경주사람만 아는 경주 여행>(아르코), <영천에 가면 나무도 절을 한다>(아르코), <경북의 민속 문화>(국립민속박물관)(공저), <구술생애사로 본 경북여성의 삶>(경북여성정책개발원)(공저), <이야기로 만나는 경북여성사>(경북여성정책개발원)(공저) 등이 있으며, 논문으로는 <내방가사 향유자들의 문명 인식과 그 표출 양상> 외 40여 편이 있다.







sitemap login home 사이트맵 관리자 메일 이용약관 개인정보 보호정책 사이트이용안내 도서출판 역락은 글누림출판사의 모회사로 '국문학의 새물결, 한국학의 새바람, 인문학의 새시대'를 모토로 1999년 4월 19일 첫걸음을 내딛었습니다.